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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보건/국제개발협력 분야 종사자 인터뷰

조성덕 선교사 (지부티 시각장애인 자활 사업)
  • 작성자이영지
  • 날짜2017-09-13 10:11:45
  • 조회수1329

[조성덕 선교사]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로 한 일이 없어서 소개할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아프리카 지부티에서 시각장애인 돕고 있는 조성덕이라고 써주세요.

(주: 조성덕 선교사는 소말리아, 케냐, 지부티에서 30년 이상 시각장애인 학교 운영, 시각장애인 전문 교사 양성, 시각장애인 자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성덕 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체류 허가를 받은 최초의 한국국적 민간인이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사업이 안정되면 운영권을 현지인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학교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왔다. 3년 전부터는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지부티에 입국해 국립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중이다. 현재 지부티에는 조성덕 선교사와 최근 입국한 퇴역군인 봉사자를 제외하면,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

지부티 시각장애인 학교는 이제 자리를 좀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케냐에서 학교를 운영하실 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케냐 때와 비교하면 좀 열악하죠. 지부티는 굉장히 작은 나라에요. 인구도 100만이 안 되고. ‘국립’ 시각장애인 학교도 하나에요. 케냐에는 여러 개고요. 그래도 국립이라 학교도 나라에서 짓고 교사도 나라가 공급해 줘요.

학생과 교사는 얼마나 있나요?

학생은 25명. 6살부터 23살 까지 있어요. 교사는 6명이에요.

교사들은 모두 지부티 출신인가요?

전부 지부티 출신이에요. 나는 여기서 교사 교육에 좀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죠. 이 정부가 노하우가 그렇게 없거든. 그리고 여기 교장도 시각장애인이에요.

지부티에는 다른 동료 없이 한국인으로는 혼자 계시는 건가요?

나라에 한국사람이 나 한 명 뿐이에요. 얼마 전에 해군 장교가 두어 명 들어와서 세 명이 되긴 했지. 그 사람들은 또 떠나지만.

외롭지 않으세요?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많으면 좋겠는데요.

도와줄 일이야 태반이지. 특히 여기 학교 공중보건 문제가 심각해요. 아예 개념이 없는 것 같거든. 우리가 어릴 때도 학교에서 구충약 같은 것을 먹고 그랬단 말이에요. 여기 학생들도 뱃속에 기생충이 우글우글 해요. 학교에서 가끔 건강검사 같은 것을 하는데...정기적이지가 않죠. 여기오면 연구할게 많아요. 우리집에서 재워줄테니까 인력 좀 보내줘봐요(웃음). 

케냐 다음으로, 이번엔 지부티를 새 시각장애인 사업 장소로 택하셨는데 이유가 있나요?

여기가 아무래도 안전해서 그래요. 그리고 소말리아에 세워놓은 학교도 내가 오가면서 좀 봐줘야 하는데, 지부티 쪽에서 소말리아로 가는 것이 훨씬 안전하거든요. 케냐쪽에서 소말리아로 입국하기에는 하도 해적이 많아서 위험하고...

지부티에는 한국 NGO가 좀 있나요?

NGO와 기업을 떠나서 여긴 기본적으로 중국이 꽉 잡고 있어요. 삼성, LG가 들어오긴 했죠. 다만 직원들은 전부 현지인이고. 여기 사람들은 삼성, LG 제품을 안 사요. 가격도 비싸고, 고장이 나면 수리하기도 어렵고. 일단 고장날 때 나더라도 당장 가격이 싼 중국제품을 사자 이거죠. 이 근처에 사해(死海)가 있어요(주: 아샬 호수.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호수로 염도 30%의 이스라엘 인근 사해보다 4% 염도가 더 높다). 그런데 사해에서 소금을 채집해가는 기업들은 몽땅 중국기업이거든.

그럼 지부티 정부는 염전 개발을 안 하고 손놓고 있어요?

중국 기업이 소금을 가져가면 수수료를 받죠. 그리고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고속도로도 최근에 놨는데, 그것도 중국이 세워줬어요. 노동력은 죄수들을 부려서 공급하고. 중국이 문화사업부터 시작해서 인프라, ODA 전부 다 점령해가는 중이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선교사님, 다른 질문을 좀 드려볼게요. 어떤 계기로 아프리카로 오시게 되셨나요?

처음 소말리아로 왔던게 83년이었어요. 우리 언니가 미8군에서 약국을 했었는데, 내가 거기서 보조를 했죠. 동료 약사가 있었는데, 이대 나온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미국에서 했다고 했나? 그래서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약 명칭을 제대로 몰랐어요. 그때 당시에는 정식 약 이름과 사람들이 사용하는 약 명칭이 달랐거든요. 근데 나는 정식 약품의 이름을 몰라도 통용되던 약 이름을 잘 알았거든. 그게 부대장 눈에 띄었던 거죠. 그래서 부대장이 영어학원도 보내주고, 미국에서 지역개발분야 훈련도 받게해주고, 그렇게 경력을 쌓았어요.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월드 컨선(World Concern)이라는 단체의 관계자를 만나 2년 계약을 맺고 소말리아에 가기로 한거에요.

83년이면, 그 때가 외국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던 시기였나요?

여권 얻는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상대 국가에서 초청장을 보내주고 신분이 확실하면 여권이 나왔어요. 당시에는 여권이 나오면 정부에 줄 있는 사람 소리를 들었지. 나도 여권 나왔다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니까요(웃음).

소말리아 생활은 어떠셨어요?

처음 소말리아에 갔을 땐 참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우리나라 시골같은 느낌이 났다고 보면 돼요. 30년동안 참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때 운좋게 그 나라 외교관들과 연이 닿아 비자도 발급받았어요.‘패밀리 라이프 센터’라는 보육원도, 당시 소말리아에 진출해있던 국군 상록수 부대의 도움을 받아서 지었죠. 처음에는 그렇게 아이들 돌보고, 바느질 가르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시각장애인학교를 시작하게 된거죠. 다만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현지인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죠. 나도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국에서 2년 근무하다가 케냐로 내려간거고.

케냐에선 어떤 일을 하셨어요?

케냐에선 시각장애인 학교를 직접 운영한 것이 아니고, 시각장애인 학교의 장학 사업을 했어요. 돈 없는 아이들 장학금 보태서 입학시켜주고, 졸업생들 직업 알선해주고, 가난한 시각장애인 아이들 모아서 돌봐주고, 그런 일들이에요.

케냐로 가신 이후에 소말리아 학교는 잘 운영되던가요?

처음에는 돈을 보내줬는데, 돈만 받고 일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인 동료를 보냈죠 한동안은.

학교에선 어떤 교과목을 가르치나요?

교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시각장애인 학교에서는 ‘일상생활기술(Daily living skill)’을 주로 배워요. 차도 끓여마시고, 길도 찾고, 요리도 하고...이런 것들이 시각장애인에게는 정말 중요한 기술이거든. 요즘엔 학생들이 케이크도 만들더라고요.

아, 정말 그렇겠네요. 그게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겠군요. 그러면 시각장애인 학교를 운영하는데 어려운 점은 어떤 점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교사 훈련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교사를 훈련시켜야 하는데, 지금 지부티의 교장선생님이 그런 역량을 가진 분이에요. 다만 그분도 맹인이라 한계가 있죠. 그 간극을 제가 메우고 있는 것이고요. 기본적으로 역량이 훌륭한 교사들이에요. 점자도 잘 알고,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고요, 소말리아어와 영어도 해요. 나는 영어밖에 못하는데. 그리고 또 필요한 것이 통학버스에요. 아무래도 버스가 있으면 좀 더 먼 거리에 살고 있는 맹인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3년 전부터 계속 버스후원을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참 그게 쉽지가 않네요. 버스가 있으면 통학용도 말고도 이동식 진료차량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부티 정부 지원은 별로 없는 편인가요?

정부 지원이라기보다는 유니세프에서 많이 도와줘요. 교사 월급도 주고, 얼마 전에는 점자 교과서도 인쇄해서 보내고 하더군요. 또 시각장애인이 쓸 수 있는 교구같은 것들도 보내주고. 그런데 이게 현지 교사와 의논해서 합의된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네들이 보내주고 싶은걸 보내줘요. 교구가 있지만 교사가 다루질 못하니 창고에 쌓여만 있는거죠. 점자교과서도 현지 실정에 맞게 우리가 다시 펴낼 계획이에요.

시각장애인 학교의 존재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나요? 몰라서 입학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긴 우리처럼 1년에 한 번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입학해요. 학교의 존재를 알고, 통학할 수 있는 거리면 바로 입학하는거지. 수업료는 나라에서 다 지원해주거든요. 통학버스가 참 중요해요. 여기 학생들은 주로 원거리 통학생이 많아요. 기숙사가 없기 때문에 통학버스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되죠.

아프리카에 오신지 35년이 다 되어 가세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삶을 사실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종교적 사명감 때문입니까? 사명감만으로도 이렇게 사실 수가 있는건가요?

(웃으며)세월만 간거지. 사명감만으론 안 되죠. 일단 재미가 있어요. 사람들이 바뀌어간다는 것이요. 내가 질문 하나 해볼게요. 선천적 시각장애인과 후천적 시각장애인 중 어느 쪽이 더 힘들까요?

음...아마 후천적 시각장애인 아닐까요?

맞아요. 보이다가 안 보이는 사람들은 빛과 색이 뭔지 아는거죠. 아는데 못보니까 상실감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 굉장히 침울한 상태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시각장애인 학교의 도움을 받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돼요.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정말 뿌듯하지요.

어떤 가치를 좇을 것인가 하는 문제네요. 선교사님과 같은 가치를 지향해도, 처우 문제로 주저하는 저같은 사람도 새겨들을 만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보통 NGO에서 해요. 처우가 별로 안 좋지만, 길게 보면 나쁠 것 없어요. 현장 근무 몇 년 하면 보통 국제기구로 많이들 옮겨가니까요.

만약 저희 서울대 보건대학원 학생들이 케냐나 지부티 맹학교로 간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연구할만한 주제 같은 것들이 있을까요?

음, 지역개발(Community Development)이나 공중보건 주제는 정말 많지요. 건강실태조사도 수요가 정말 크고. 그리고 기생충 관련 연구도 할 게 많아요. 케냐 사람들은 채소를 정말 많이 먹거든. 근데 채소에 기생충 알이 어찌나 많은지 이게 사람 몸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기생충약을 먹였더니만 기생충이 막 눈으로 나오는데...어우, 정말 끔찍해서 못봐요. 그래서 요즘엔 채소농사 지을 때 약 치라고 얘기해요.

듣고보니 거기엔 길거리에 널린 것이 연구주제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체류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와요. 우리집에서 한 10명 정도는 지낼 수 있으니까요(웃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 더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꿈이 있으세요?

농아와 맹아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음악학교 만들기? 농아는 춤을 출 수 있고 맹인은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음악으로 삶을 개척해보고 싶어요. 시각장애인 학교와 관련해서는, 얼른 부지를 매입해 기숙사 건물을 좀 짓고 싶고요. 그러면 학생들이 통학을 안 해도 될테니까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선교사님은 한 해 한 해 열정이 더 커지시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좋은 소식 계속 전해주세요.

학생들 보내주면 좋은 소식도 금방금방 전달되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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